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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2013-08-06 추천 3 댓글 0 조회 1149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WCC부산총회 앞둔 한국교회 방향과 전망 김길성 교수(총신대 부총장·통합대학원장)

20130619() 11:56:23 김길성 교수 ...@kidok.com

WCC 이전 역사적 개혁주의로 돌아가자

한국교회 일치·연합운동 대표하지 못하는 WCC부산총회 반대

오직 성경만으로개혁전통 따르는 성경적 에큐메니즘 천명해야

 

김길성 교수

10WCC 총회가 1030일부터 118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교회는 WCC 총회 부산 개최가 확정된 이후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예장합동을 비롯한 보수교단은 지금도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표방하는 WCC의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100만인 서명을 받아 WCC 총회에 보내기도 했다. 본지는 WCC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한국교회에 WCC의 성경관, 사회윤리, 사회참여, 종교다원주의 등을 상세히 게재하여 한국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WCC 부산총회 유치는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는 1948822일부터 9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 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를 참석케 하였으나 상반된 보고서를 통해 WCC 신학의 방향 선회와 신학의 변절을 한국교회가 알게 되었다. 그 후 WCC 문제로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우리 총회는 WCC와는 완전 단절하였고,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통합측은 제3(1961), 4차 총회(1968)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김길창(NCCK 회장), 길진경(NCCK 총무),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WCC의 산하단체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성공회 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이들 교단 중 절반 이상이 한국교회 안에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고 나머지는 이에 동조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한국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 소요의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WCC1948년 화란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 이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제2차 총회,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3차 총회,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제4차 총회,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5차 총회,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제6차 총회,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총회, 1998년 짐바웨 하라레에서 제8차 총회, 2006년 브라질의 남부도시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제9차 총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가질 예정이다.

 

WCC 신학은 sola scrptura의 원리에 어긋난다

 

WCC 신학과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나, WCC를 있게 한 단체나 기구의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제4차 세계대회인 몬트리올회의(1963) 보고서(제목: “성경, 전통, 전통들”)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의 전통(, 복음선포 kerygma의 전승 paradosis)에 의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한다(단락 제45). 그러나 본래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전통(Tradition)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성경(Bible)은 말하자면 그것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되어진 전통(Tradition)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중요성은 성경과 전통이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들이 아니라는 인식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두 가지(성경과 전통)는 너무 얽혀 있어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권위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벗어난 주장이다. 이는 기록된 성경과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WCC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기초인 칭의교리에 어긋난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에서는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The Joint Declaration of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1999)을 통해 칭의 문제에 관한 한 16세기에 있었던 상호정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고, 2006년에는 세계감리교협의회 제19차 총회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감리교회가 동의하였으며, 이를 WCC에서는 적극적으로 수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sola gatia),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sola fide) 도리를 선포한 종교개혁의 기치가 분명한데, 이제 와서 로마교회가 받아들인 칭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박형룡 박사가 평양신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로 문을 닫은 후에 중국에서 가르치다가 1947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 몸담았으나 1948년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온 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 됨을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 박사가 19511225일 고신측 지도자들을 향해 호소한 말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그의 생각과 열망을 볼 수 있다.

 

출옥한 지도자들이여 우리 교회 전체의 회개의 지연함에 불만하여 당파를 이루어 교회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일이겠습니까? 교회전체의 회복갱신이란 원래 힘드는 일이요 일조일석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참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그들 속에 남아 있어 그들을 잘 권면하여 회개시키는 것이 출옥성도 여러분들의 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일치를 사모한 신학자였으나 장로교회가 WCC에 남아있을 것인가를 결정해야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이거나 끌려가는 것보다는 그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WCC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교회를 지도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WCC 부산총회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28),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23)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우리 총회는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속회(1123)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결의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시작한 평양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총신대학교는 올해로 112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가 독자노선을 취한 것은 총회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범 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우리 총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이후의 분열(1979년 개혁측, 1980년 개혁합신측)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과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외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11000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WCC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요, 우리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따라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을 천명한다.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2)WCC와 한국교회-1959년 통합측 이탈을 중심으로 정성구 목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현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장) 20130703() 13:26:13 정성구 목사 ...@kidok.com

에큐메니칼 운동이 형제와 교회 갈라놓았다

WCC 가입 문제로 첨예한 대립신학 충돌을 교권다툼으로 부각, 본질 흐려

불법 총회진행·신학교 습격은 이탈증거개혁주의공통분모 잊지말아야

 

정성구 목사

 

합동측 장로교회와 통합측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 같은 뿌리로서 신조와 교리와 정치에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9WCC 에큐메니칼 가입문제로 서로 나눠진지 벌써 54년이 되었다.

 

1.1959년을 전후한 한국 장로교회의 분위기

 

1950년 초에 기장이 분열되고 고려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은 한국 장로교회는 수년 동안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가던 중에 이른바 세계교회협의회 곧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로 교회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 당연히 교회 안에는 WCC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WCC 운동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WCC를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연합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창설자인 마포삼열 박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사수하고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한 보수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본국의 신학과 신앙과 정치에 따라서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하도록 적극 지지할 뿐 아니라 총회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영향력을 과시했다.

 

2.3천만환 대 3천만환

 

당시 기록을 보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기를 든 분은 장로회 총회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박형룡 교장은 학교 부지를 구입하려다가 박호근에게 걸려 3천만환을 사기 당했다. 사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자일 뿐 학교 행정에는 어두운 분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교권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공격했고 그 후 박형룡 박사는 사임하고 임시교장에 노진현 총회장이 시무케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통합측 모든 인사들의 강연, 세미나 그리고 유인물에는 합동측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며, 박형룡 박사를 옹호하기 위한 세력이 WCC를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19603총회장 수습위원장, 증경총회장, 총신동창회장 성명서, 2.17 집단의 무법성이란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연동집단과 미국인 안두화씨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불법으로 등록하였고, 은행에 예금한 공금 약 3천만환 즉 보상금 2400만환 경상비 400만환을 재단 이사장이란 명의를 악용하여 회계도 모르게 비밀히 찾아내어 일방적으로 사용하였다. 교회일을 세상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나 문교부당국을 속여 재단 이사를 불법 변경한 것은 법에 의해 시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부득히 법적 조치를 취한것 뿐이다. 이제라도 피고측이 불법 변경한 재단이사와 교장서리를 즉시 취소하면 법적고소는 취하하게 될 것이다.” 라고 총회장, 임원, 증경총회장들이 연명 날인했다.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은 사표수리로 귀결 되었으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섰던 안두화씨의 불법 사용한 3천만환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다.

 

3.분열이냐 이탈이냐

 

1959년 이후에 모든 문건에는 통합측 총회 건을 분열과 이탈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서 이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통합측은 총회법에 맞지 않게 이루어졌다. 44회 대전중앙교회의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를 받는 문제를 두고 개회만 하고 시간을 모두 허비해 버렸다. 그래서 정회 되던 날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진행의 묘방으로 총회속회를 증경총회장 회의에 회부하기로 총회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증경총회장 회의에서는 1124일까지 정회하기로 하여 그 안을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으로 하여금 총회에 제출하였다. 총회는 이 안에 가부를 물어 가결을 얻어 정회를 선언하고 기도로 마쳤다. 바로 정회가 이루어진 직후에 갑자기 안광국 목사가 단에 올라가서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자기 자신이 가부를 물어 몇 사람의 호응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 연동교회에서 불법집회를 하고 총회라 칭했다. 교회는 헌법(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총회규칙 각부 규칙 등이 있는데 그 중에 불신임이란 없다. 세상법으로 하더라도 그같은 방식은 민주주의 세계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섭섭한 말이 되겠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통합측은 본 총회로부터 이탈이란 말이 된다.

 

둘째는 신학교의 이탈이다. 19591117일 신학교가 아직도 종강을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과 사무직원이나 일방의 이사나 교수에게 일절 알리지도 않고 선교사들과 계일승씨는 신학교 직원 김규당, 박창환, 김윤국 목사 등을 대동하고 트럭 5대와 수십 명의 인부를 데리고 1117일 새벽 미명에 평화롭고 신성한 신학교에 돌연 침입했다. 그들은 학교 수위의 반항과 거절을 물리치고 굳게 잠가둔 문과 자물쇠를 파괴하고, 학교 비품을 강제로 꺼내어 트럭에 싣고 황급히 도주하려 했다. 순간, 회현동 기숙사 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 선교사 배의취, 마펫, 곽안전, 옥호영, 데가보, 썰멜빌 제씨와 계승일씨 등은 학생들에게 추궁과 비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부끄러운 질문을 받고 심히 당황하였다. 선교사들은 운전기사에게 운임을 더 많이 줄테니 속히 옮겨달라고 하여 보았고 학생들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학생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교직원들과 선교사들의 불법한 행동을 힐문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18일 새벽 430분에 또 다시 군인 수십 명과 트럭 6대를 동원해서 신학교 습격을 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3선교회에 대한 경고문, 총회장과 2개 노회 연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얼마나 좋았으면 선교사들이 진두지휘하여 야간에 신학교의 물건을 가져가려 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신학교의 물건 중에 선교사들이 후원한 것이 많아 가져가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다. 역사적 사건인 만큼 그대로 밝히는 수밖에 없다.

 

4.교권충돌인가 신학충돌인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59년 대전 총회가 있기 전에 양측에서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 가입 여부를 두고 엄청난 설전과 성명전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591월에 우재(유호준 목사라함)란 익명으로 발표된 에큐메니칼 반대운동에 대해 답변서라는 성명서로서 WCC 탈퇴건의서에 대해서 감정에 찬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그 핵심적 내용은 WCC 반대하는 측을 불순한 교권운동’ ‘반교회운동’ ‘부패한 교권주의’ ‘바리새교인’ ‘교회제도주의’ ‘교파주의’ ‘근본주의’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며 불신앙적 인사들이라 하고 심지어 WCC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열주의자’ ‘사탄이라고 세 번이나 지칭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저주와 비판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이는 당시의 에큐메니칼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였고 세월이 반세기가 흘러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있다. 한편 당시 이런 성명서를 보고 정제(조동진 목사)라는 익명으로 우제의 답변서에 답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제의 답변서에는 우제의 글이 지나치게 과격한 문장임을 지적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법과 목표가 비성경적임을 증명했다. 특히 우재가 항상 정통보수임을 말하다가 갑자기 근본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이론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갔다. WCC 지지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세계 정세에 어둡고 무식한 사람들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주의 사람이라고 비난했지만, 1958년의 조동진 목사는 국제 문제에 훤히 밝은 기독교 언론인 출신의 목사였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교권충돌이 아니고 신학충돌이다. 최근에 최덕성 교수는 에큐메니칼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곧 신학충돌이라고 썼다. 오늘의 문제는 이미 55년 전에도 한국 장로교회에 있었던 내용이다.

 

5.개혁주의 신앙이냐? 에큐메니칼 정신이냐?

 

1959년 총회가 나누어진지 40년 되던 1999년과, 50년 되던 2009년에, 양교단의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특히 40주년 되던 해는 양측 대표 3인이 대전 중앙교회 당회장실에 모여 서로 대화와 소통을 갖고 함께 화기 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오찬을 나누었다.(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 총회장끼리 강단 교류도 있었다. 그런 후에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합동측 대표 50명과 통합측 대표 50명이 함께 포럼을 가졌고 방청객과 교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여기 대표는 양측 총회임원, 원로목사 대표5, 신학교 교수대표 5, 장로대표 5명 등등 각 분야에서 5명씩이 나왔다. 주제 강연자로는 필자와 이종성 박사가 나섰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되자라고 제목을 정하고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과 신앙으로 공동분모를 갖고 있으니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 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내 뒤에 강연자로 나온 이종성 박사의 제목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하나되자고 했다. 결국 공동분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에큐메니칼 운동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형제가 갈리고 교회가 갈리는 뼈아픈 상처를 도리어 덧나게 했다. 합동측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교회들과 교회연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나 지금이나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이다.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3)WCC와 서구 자유주의-신정통주의와 로마 가톨릭 중심 서철원 교수(조직신학)

20130710() 11:37:13 서철원 교수 ...@kidok.com

타종교와 대화하자고 창조주 하나님 버렸다

바티칸 공의회, 전통적 신앙내용 전부 바꾼 종교다원주의 교리로 공식화

WCC3차 총회부터 주요의제로자기해체된 기독교로 무슨 대화하나

서철원 교수

WCC3차 총회부터 종교다원주의를 주요 의제로 토론해왔다. 금년에 부산에서 열리는 10차 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중심토론 주제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본래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교리로 제정하였다. 195979세의 나이로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1961년에 칙령을 내려 바티칸에서 공의회를 연다고 선언하였다.

 

처음 공의회를 열 때 교황 요한 23세는 종교개혁교회들을 맞아들여 한 교회를 만들려는 뜻으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교회를 갱신하여 개신교회를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려고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96383세의 나이로 죽자 바울 6세가 뒤를 이어 공의회를 진행하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회의의 방향이 바뀌었다. 교황을 전 기독교 세계의 교황에서 세계 모든 종교들 위의 교황으로 삼으려는 뜻이 강하여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3조항으로 성립되었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신을 찾거나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여 교리를 작성하였다. 교회에 관한 교리적 구성 216조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를 펼쳤다.

 

첫 조항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하였다. 첫째로 언약과 약속이 주어지고 그로부터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가 나온 백성은 조상들 때문에 가장 사랑스런 백성이다. 회개 없이 하나님의 선물들과 소명이 주어졌다.

 

둘째 조항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였다. 구원계획은 창조주를 아는 자들도 포함한다. 그들 가운데는 특별히 무슬림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고백하여 지킨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마지막 날 사람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배한다.

셋째 조항은 일반 종교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배정하여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림자와 형상들 안에서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 자신은 멀리 계셔도 그들 모두에게 생명과 영감과 모든 것을 주신다. 또 구주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모르는 것이 자기 허물이 아니지만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양심의 지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주입된 은혜 아래 행실들을 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도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상이 바티칸 공의회가 정한 종교다원주의 교리이다. 본문만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교리조항 본문 배경에 있는 신학에 의하면 전통적인 하나님 견해가 전혀 아니다. 또 구원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회가 주장하는 구원이 전혀 아니다. 로마교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이방종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신앙내용들을 전부 바꾸었다. 이 신학적 작업은 20세기 로마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카알 라아너가 이루어냈다.

 

라아너는 전통적인 교회의 믿음에 관한 가르침이 현대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였다. 로마교도인 말틴 하이덱거의 철학에 맞추어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존재 자체를 하나님으로 세웠다. 삼위일체도 완전히 제거하고서는 존재 통보 과정을 삼위일체라고 정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일 수 없다. 한낱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출생한 한 사람일 뿐이다. 원죄도 첫 인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 섬김을 거부한 반역이 아니라 존재 통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면 구원도 내세에 영생하고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현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런 신학에 바탕하여 바티칸 공의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로마교회가 그들의 신학과 신앙내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유럽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와 그 배경신학이 이해되고 알려지므로 로마교회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유럽의 교회들이 다 문을 닫았다. 교회의 전통적 신학이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므로 주일에 미사하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개신교회가 받아들여 종교다원주의를 바르고 정당한 신앙생활로 삼게 되었다.

 

WCC3차 총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주요의제로 다루어왔다. 그러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적극 권장하고 시행해왔다.

 

로마교회가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이 진행하므로 WCC도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숙이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와 대화도 깊이 진행하면서 불교의 종교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의 바른 전범으로 삼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정착시켜 종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므로 종교 간의 갈등을 없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나아가서 세계를 하나의 정부 아래 두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사상에 깊이 박혀있다.

 

비록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확정했어도 그 시작과 완전한 준비는 개신교회의 근세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근세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막허는 전통적인 하나님 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신은 사람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되어있다는 느낌을 발언하는 것이라고 정하였다. 근세신학은 피상적으로 이해하듯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유일신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었다.

 

20세기 최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바르트는 규정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을 떠나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동과 사건 뒤로 돌아가서 자존하신 하나님을 다시 붙들 수 있는 계기가 없다고 하였다.

 

20세기 3대 신학자로 인정받은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도 자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도 존재자이므로 유한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존재자일 수 없다. 하나님은 내 존재를 있게 해준 존재 자체이고 또 그런 존재로 있게 해주는 존재의 힘이라고 하였다. 존재의 힘은 용기 소망 등으로 바꿀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리므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소망의 신학을 내어 새로운 신학전개의 지평을 열은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인간 예수가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버림받아 죽었다. 만일 아버지가 있어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른 아들의 고통을 내려다본다면 그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고통이 그에게서 나와서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 십자가상에서 있었던 고통의 교류가 바로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신교회의 근세신학과 로마교회의 근세신학 혹은 현대신학이 다 동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러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내용과 신학내용이 다 없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인간 예수로 신학작업을 하는 것만 남는다.

 

기독교가 이러하면 다른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꼭 같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이런 종교신학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하여서 무슨 소득이 있는가? 기독교의 자기해체를 완벽하게 마감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다. 귀신들의 종교인 이방종교들만 번창하고 기독교는 완전히 땅에 묻히는 일만 남는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대로 옛날 옛적에 기독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잔해가 지금 대영박물관에 가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실상을 알면 종교다원주의의 진행을 결사하고 막을 수밖에 없다.

 

WCC 바로알기연속기획

WCC에 대한 역사적 비판 - 총회의 형성과 활동 중심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20130718() 13:46:53 기독신문 ekd@kidok.com

역사는 WCC 위험성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1959년 통합측 이탈의 핵심적 단초 한국 장로교단 지형 왜곡에 직접적 영향 미쳐

WCC총회 감성적 접근은 위험 선한 싸움하라박형룡·박윤선 박사 경고 잊지 말아야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WCC 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전방위적 홍보가 진행되는 가운데 성도들의 혼돈은 심화되고 있다. 과거 역사적 진실을 체험한 세대들은 그나마 감이라도 잡고 있지만 교회 안의 신세대들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최근 WCC 준비위원회의 일간지 홍보 내용에 따르면 WCC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교제요, 성경적 권위 위에 굳게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심지어 공산주의 이념, 동성애, 일부다처제까지 지지하거나 결의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피상적인 내용만을 접한 성도들은 이러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WCC의 신학적 정체성과 총회와의 역사적 관계성을 살펴보면 섣부르게 용인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1)

 

한국장로교회가 아직 WCC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비교적 일찍이 WCC 신학적 위험성에 경종을 울린 분은 박윤선 박사였다. 당시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박윤선은 WCC가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이렇게 비판하였다. “WCC운동은 신신학적이고 타협주의적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해석을 각자의 자유에 맡기어 올바르게 믿지 않아도 교회라고 하며, 그 어떤 교회라도 모두 다 서로 뭉치어 하나가 되기를 도모한다. 이것은 항의자(프로테스탄트)의 걸어온 길을 후회하며 일소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연합을 즐기는 운동이며, 따라서 개혁파의 올바른 신앙노선을 오착으로 여기는 그릇된 주의이다”(파수군, 1951). 박윤선은 이러한 때에 부전론자(不戰論者)와 주전론자(主戰論者) 중에 누가 참 예언자인가를 질문하면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박윤선의 이러한 경고대로 WCC는 암스텔담에서 에반스톤 총회 사이(1948~1954)에 이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론이 등장하는 등 상당한 신학의 변질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고신과 기장의 연이은 분열에 골몰하였기에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총회는 1954년에 와서야 김현정과 명신홍 목사를 WCC 2차 에반스톤 총회의 대표로 파송하여 이를 확인 보고토록 하였다. 이 두 참석자의 견해차가 컸는데, 명신홍은 김현정과 달리 WCC 운동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은 당시 한국장로교회 안에 WCC 문제를 두고 신학적으로 상반된 두 견해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8)

 

WCC 문제를 놓고 총회 안에 찬반 기류가 점증되자 195641회 총회는 8인의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WCC 지지파의 대표격인 한경직, 반대파의 대표격인 박형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한경직은 총회 석상에서 에큐메니칼 찬성발언을 하면서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든다면, 에큐메니칼이란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에게 쫓겨서 산중 동굴 속에 피신한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불교 승려 세 사람이 이념과 사상은 다르지만 친밀했던 것과 같다.” 비유의 적절성을 떠나 현대 WCC가 추구하는 종교다원론의 모습을 예견이나 한 듯해서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박형룡은 이러한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에 박형룡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신학지남, 1958)이란 논문을 통하여 WCC 운동의 위험성을 전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의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신학을 칼빈주의 개혁파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규정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과 교회합동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코 탈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한국장로교회 안에 박형룡과 한경직 간의 신학적인 갈등은 해묵은 것이었다. 박형룡은 일찍이 193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비등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 여성의 교권문제 등으로 제기된 역사비평주의를 막고 정통적 성경관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고등비평을 수용한 아빙돈 단권 주석 작업과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처리할 때 옹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입장을 달리하였다. 한경직의 신학적 이념이나 성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지만 표출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WCC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WCC 문제로 인한 총회의 분열(1959)

 

한국장로교회는 WCC 문제를 놓고 양 진영으로 재편되어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총회에서 구성한 연구위원회마저 표류하였고, 195843회 총회에서는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부터 결성된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WCC간에 기구적인 대립까지 겹쳐서 한치 앞을 예견치 못할 지경이었다. 분열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총회장 노진현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단 지도자들이 중재에 나서 교회 평화의 방안이란 4개항의 해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195992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된 44회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양측의 치열한 갈등으로 인해 결국 총회는 1123일에 속개하기로 결의하고 정회하였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지지파는 서울 연동교회로 자리를 옮겨 단독으로 불법 속회를 열었다. 이를 두고 교회사가 김영재 교수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통합측에서 볼 때는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겠으나, 그것은 분명한 쿠데타와 같은 것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고려파와 기장파의 경우는 다수결의 법적 절차에 따라 총회에서 축출하는 절차를 통하여 분립하게 되었으나, 주류와 비주류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백중지세의 두 분파가 분열할 때는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에 탈법적인 분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59년 한국장로교회 대분열의 핵심적 단초는 WCC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통합측과 일부 고신측 사가들은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WCC 문제보다는 총신의 삼천만 환 사건이나 경기노회 총대사건으로 기술하였다. 이에 당시 총회장으로 분열을 온 몸으로 체험했던 노진현 목사는 그의 회고록 <진실과 증언>에서 역사는 창작될 수 없으며, 왜곡된 교회사의 전수와 재생산은 분열의 아픔 못지 않은 고통을 안겨준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분명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대분열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부터 상존하던 신학적인 차이가 WCC를 통로로 분명하게 확인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WCC 문제는 혹자들의 주장처럼 단지 분열을 위한 명분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신학적인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담아낸 새로운 그릇이었다. 차제에 분열의 원인을 두고 저들이 가진 정치적인 관점은 시급하게 신학적인 관점으로 재해석 내지는 재진술 되어야 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WCC 문제는 우리 교단의 구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적 사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계 일각에서의 주장처럼 ‘WCC 부산 총회가 기독교 올림픽이며, 한국교회의 자랑인데 남의 잔치에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는 대단히 감상적인 접근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분명히 할 것은 WCC 문제는 교단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이지 결코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제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WCC 신학을 방심하며 따라갈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한다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경고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이 WCC를 영구 탈퇴한 이후 지금까지 반대하는 것은 우리 신학의 배타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수호에 대한 확고한 태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 안의 성도들은 막연함 가운데 상당한 혼돈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교단의 각 교회들은 WCC 신학의 정체성을 성도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고, 자유주의 계속적인 도전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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